난 피스타치오를 좋아한다.
땅콩처럼 얇고 무른 껍질이 아닌, 호두처럼 도구를 이용해야만 열 수 있는 이기적인 딱딱한 껍질은 아니지만,
단단히 결계를 둘러 싸고 있는 보호막을 가져 힘을 조금 들여야 고소한 알맹이를 빼 먹을 수 있는 이 도도한
견과류를 좋아한다. 오늘도 난 몇알의 피스타치오를 까 먹으며 진솔과 건을 생각해 본다. 소설을 읽으며 나와
같은 취향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면 어쩔 수 없이 뇌리에 남는다. 나처럼 피스타치오를 좋아하지만, 혼자 까 먹
는건 싫어하는 네츄럴 본 나쁜남자 건PD를 사랑하기 시작한 진솔이의 마음이 담긴 장면들이 보고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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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타치오 scene # 01.
P.131-137
혜화동 낙산공원 아래 어느 편의점에서 여자들은 맥주와 안주거리를 고르고 있었다. 매장 선반에서 애리가
땅콩과 잔멸치가 든 캔을 집어 드는데 그 손톱 끄트머리마다 봉숭아물이 초승달처럼 남아 있었다. 진솔이 아
몬드 캔을 같이 집어 들자, 애리가 웃으며 말했다.
"피스타치오로 사요. 건이는 피스타치오 껍질 까먹는거 좋아하거든요."
"... 그래요? 아무거나 먹지 않고서."
진솔도 웃으며 아몬드 캔을 내려놓고 피스타치오 캔으로 골랐다. 계산을 치르고 밖으로 나오자 나란히 담배
를 피우고 있던 남자들이 쇼핑봉투를 받아 들었다.
.
.
.
문득 진솔이 말했다.
"... 봉숭아 물이 참 고와요."
애리가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여름에 선우가 들여준 거예요. 첫눈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좋겠는데. 많이 내려가 버려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거 때문에요?"
"응. 그걸 꼭 믿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기분에."
그렇게 웃는 그녀가 예뻐 보여서 진솔은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소원이 뭔데요. 물어봐도 된다면."
잠시 망설이더니 애리는 고백하듯 입을 열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선우가... 이제 우리 결혼해서 아기 가질래? 하고 말해주는 거요."
그러곤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지금 숲길앞의 풍경이 순간 아득해 보여 진솔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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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타치오 scene # 02.
P. 207-208
건의 방은 마루 통로를 사이에 둔 맞은편에 있었다. 그가 VTR에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재생시키는 동안,
진솔은 벽에 붙여놓은 2인용 소파를 혼자 차지하고 앉았다. 건은 뒤로 오더니, 방바닥에 앉아 다리를 쭉 뻗
은 채 소파에 등을 기대고 보기 시작했다. 바닥엔 주방에서 꺼내온, 심심풀이로 집어먹을 땅콩과 피스타치오
접시가 놓여 있었다.
영화 타이틀이 끝나고 본격적인 스토리로 접어들 무렵, 땅콩 접시로 뻗는 진솔의 손길을 건이 손등으로 쓱
막았다.
"가위바위보해요."
"...왜요?"
"아무튼."
그를 따라 가위바위보를 했다. 건이 보. 진솔이 바위. 건은 짓궂게 쿡쿡거리더니 땅콩 접시를 그녀의 무릎
에 올려놓았다.
"진솔 씨가 껍질 다 까요. 진 사람이 까고, 이긴 사람은 거저먹기."
그녀는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조금 노려보았다.
"얄밉다."
"뭐가? 속임수도 아닌데."
건은 은근히 즐거워하며 브라운관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별수 없이 진솔은 땅콩과 피스타치오 접시를 무
릎에 놓고 껍질을 까면서 영화를 보았다. 가끔 그가 손바닥을 소파 위로 내밀면 깐 알맹이를 얹어줘 가면서.
이윽고 껍질을 다 벗긴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는 쿠션을 품에 껴안고 몸을 소파에 편히 기댔다.
아, 너무 열심히 깠나? 슬며시 졸렸다. 그와 같이 있으니 분명 설레는데, 그러면서도 아주 아늑하고 조금
쯤 행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글펐다. 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서글픈 이유 따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금이 좋아서, 이대로 고요히 두고 싶은 기분.진솔은 졸렸지만 몰래 눈을 부비면서도 맞
은편 방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그와 같이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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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이 피스타치오를 좋아한다는 말에 두번 더 생각하지 않고 안주거리로 피스타치오를 사는 진솔. 그런 건과 지내온 시간 만큼이나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애리.애리가 사랑하는 선우. 선우가 곱게 들여 준 봉숭아물. 첫눈이 내릴 때까지 애리의 봉숭아 물은 여전히 손톱을 물들이고 있었을까.
건의 유들유들함에 언제나 넘어가 버리고 가는 진솔.
나 같으면 이유없는 가위바위보는 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 의심없이 속아넘어 가 주고 피스타치오의 껍질까지
야무지게 까 주는 진솔. 건의 그런 천연덕스러운 모습까지도 진솔의 눈에는 애정하는 면모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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