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52
나를 죽인 사람과 누나를 죽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아직 죽지 않았다 해도 그들에게도 혼이 있을 테니, 생각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내 몸을 버리고 싶었어. 죽은 그 몸뚱이로부터 얇고 팽팽한 거미줄같이 뻗어나와 끌어당기는 힘을 잘라내고 싶었어.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P. 102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P. 122
그날 아침 새로 받은, 세제 냄새가 풍기는 깨끗한 푸른색 수의를 입고서 나는 즉석 총살이란 말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정말 닥쳐올 총살을 기다리듯 숨을 죽였습니다. 죽음은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라고.
P. 135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동호, 정대, 정미, 영재, 진수, 은숙, 선주...
그리고 실제로 학교 선생님인 남편을 기다리다 임신 8개월때 총을맞고 사망한 최미애님.
그 날 금남로를 가득 메웠을 시민들.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
그리고 그날 이후로도 피로 물들어간 젊은 영혼들.
우리는 그 모두를 영원히 기억해야만 한다.
책장을 덮었음에도 슬픔이 영원할것만 같다.
80년의 광주에서 스러져간 영혼들. 어찌어찌 살아 남았지만 여전히 그 순간의 고통에 머물러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깊게 박힌 상처들이 아파 눈물이 흐른다.
한강이라는 작가의 치밀한 구성과 묘사에 그 슬픔의 무게는 더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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