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39-140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 사람도 없는 막차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에까지 가는동안 뭐가 그리 즐거웠던지 한없이 웃었던 기억, 아파트 근처 으슥한 벤치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어색한 마음에 둘이서 처음 입맞췄던 기억, 자존심 때문에 공연히 투정을 부리다가 되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서 그만 혼자서 울어버린 기억, 사랑이 끝난 뒤 지도에 나오는 길과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과, 차가 디는 길과 어두운 하늘만 보이던 길을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기억.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가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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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을 저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존재다. 예컨대 1천송이의 꽃이 있다고 치자. 한 송이 꽃은 1천 소잉 중 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한 송이 꽃이 없다면 999송이의 꽃은 존재할지언정 1천 송이의 꽃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랑을 한다는 건 그 한 송이 꽃을 통해 1천 송이의 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자신도 1천 송이의 꽃이되는 한 송이 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는 일이다.
사랑이란 건, 때론 전부全部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실체는 전무全無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아내가 된 선영의 느닷없는 첫번째 사랑고백에 대한 광수의 반응이 왜 웃기면서도 서글픈걸까..
빗소리가 꼭 젖은 눈으로 속삭이는 소리 같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팔레노프시스 꽃대 한 송이가 꺾여있던 선영의 부케를 보니,
내가 들었던 - 꽃 이름은 잘 모르나 - 아이보리 색깔의 웨딩드레스와 나름 잘 어울려던 내 부케가 갑자기 생각난다.
그 때 그 부케, 꽃대가 꺾여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기억 못하는 나는 영수증 하나 정도 없어도 되는 무감각한 사람이니 괜찮을 것 이다.
꽃대가 꺾여있었건 아니건, 그런 것 하나가 무엇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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