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빠른 이 세상에 멀미가 난다. <빨리빨리> 정신이 우리나라를 급 성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야기들 하지만, 내가 따라갈수 없이 버거운 이 빠른세상, 나는 그 한귀퉁이에 서서 바라만 보고 있을 때가 있다. 도태되어 간다는 조바심이 날 때도 있지만, 어쩔수 없다 내가 이 빠른 세상을 따라잡으며 뛰기엔 용기도 그러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수요일의 커피하우스>
그날그날 바뀌는 메뉴. 오늘의 커피. 오늘의 아침식사. 오늘의 샌드위치. 그리고 항상 들어가는 문구. 저희 집은 슬로우푸드를 지향합니다. 정해진 메뉴없이 그날그날 메뉴가 바뀌는 그곳. 재료가 떨어지면 장사도 끝이라는 주인. 나이가 정확히 몇살인지 나오지도 않고, '이수완'이란 주인의 이름도 명함에서 스치듯 한번만 언급된다. 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21세기의 사람들이 바라보기엔 그저 답답할 수도 있는 공간과 그에 딱 걸맞기는 한 사람이다. 한달에 85만원 이라는 월세는 무슨 돈으로 내며 장사를 하는지, 가게에서 가까운 이유로 같이 임대한 살림집의 월세는 어떻게 충당하는지, 하루에 커피는 몇잔이 팔리고, 샌드위치는 몇개가 팔려 얼마만큼의 이윤이 나는지.. 책을 읽으면서 주인이 지향하는 슬로우푸드 보다는 이런것들이 더 궁금했던 나는,영화 <리플리>가 언급되는 부분에서 문득 부엌 찬장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몇년된 나의 모카포트가 생각났다.
커피메이커에서 똑똑 떨어지던 마법의 액체에 만족 못하던 나는, 비싼 에스프레소 기계 대신 저렴하고도 실용적이라는 '모카포트'란 것을 알게 되고 바로 B회사의 2인용 제품으로 구입했다. 그나마 쉽다는 드립커피나 향이 살아있다는 사이펀 커피 등등에 비해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기 쉽고, 전혀 떨어지지 않는 품질 - 개중에는 전자식 에스프레소기계 보다 낫다고 찬양하는 사람도 있을만큼의 - 등 많은 사람들이 추천을 날리던 그 제품을 손에 넣었었다. 한동안은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그리고 카푸치노와 라떼등 커피 한잔, 한잔을 만드는 재미로 보낸 적도 있었다.
맛과 향은 좀 떨어져도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디카페인 분쇄커피를 사다 하루에 5~6잔씩 마신적도 있었다. 물과 커피를 담아 주전자까지 조립하고 강한불에 끓이기 시작해서 에스프레소가 추출하면 불을 약하게 하고 기다린다. 분량의 에스프레소가 다 추출되었다 하더라도 압력에 의해 더 흘러나올수 있으니 불을 끄고 기다린다. 칙칙 소리와 함께 에스프레소가 밀려 나오는 그 첫 순간이 보고 싶어 달려있는 윗 부분 주전자 뚜껑을 열고 기다린 적도 있다. 쪼르르 에스프레소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부엌 전체에 퍼지는 향긋한 커피향에 마음이 차분해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어느날 부터, 우리 주방에는 아날로그 스타일의 모카포트 대신에 귀여운 외모와 빠른 스피드와 다양한 커피종류를 자랑하는 캡슐커피머신이 등장했다. 그리고 모카포트는 잊혀졌고, 그날 이후로 캡슐커피머신은 비싼 유지비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고 있다. 내가 읽은 이 책은 한동안 열심히 쓰며 사랑해줬지만 결국은 더 간편하고 빠른 캡슐커피머신에 밀려 어딘가로 밀려난, 아니 숨어버린 모카포트를 생각나게 해 주었다.
화자인 '나'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불우한 가정환경, 넉넉하지 않은 생활. 아직 학생의 신분이지만 이런저런 삶이 녹록치 않아 보이는 '나'는 딱히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은 거리에서 한번쯤은 스쳐지나 갔을 법한 흔한 사람이라 생각된다. 이런 '나'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 3명이 등장한다. 어쩌면 이 셋은 '나'가 가지지 못한 삶을 골고루 나누어 갖고 '나'에게 보란듯이 내보인다.
한명은 슬로우푸드를 지향하는 주인. 처음에 열심히 외벽을 빨간페인트까지 칠해 놓았던 그녀는 처음에 부업쯤으로 이 커피하우스를 차린건 아닌지 궁금해질 정도로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어찌보면 물질로 인해 적잖히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던 '나'에게 좀 더 다른 세상을 보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멘토가 된다.
또 다른 한명은 중3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플랜을 모두 짜 놓고 그에 맞춰 스타벅스에 버금가는 큰 커피체인점을 만들려는 살바도르 김재원. 세상이 정해놓은 나이란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리지만, 어찌보면 정신적으로는 '나'에 비해 성숙해 보였던 그 아이. <수요일의 커피하우스>에 출근도장을 찍듯이 방문하며 주인은 결코 귀담아 듣지 않는 장사의 기술과 상업적 논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아이를 보면서, 정말 '나'와는 다른 게다가 나랑도 다른 별세계의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찌 보면 부럽기도 했는지 모른다.
여전히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는 서른의 나보다 이미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현실로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열다섯 즈음의 그 아이가 더 현명한 것일테니 말이다.
그리고 '나'의 친구 유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보이는 삶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과시하고, '나'가 봤을땐 적어도 걱정 없는 삶에서 끊임없이 불만을 이야기 하고, 연애에 있어서도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사랑인지 아닌지를 놓고 저울질 하는 그녀. '나'의 관점에서 본다면 호강에 겨워 요강에서 노를 젓고 있다고 생각될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그녀 또한 '나'에게는 결여된 또 다른 삶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 주인의 집 앞마당 화분에서 부엽토에 몸을 의지한채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기 시작한 커피나무 처럼, '나'도 이제는 자신만의 부엽토 안에서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지금의 내가 가진 빠른세상을 동경하는 무기력함 보다는, 슬로우푸드를 지향하며 자신만의 이상적인 <수요일의 커피하우스>를 만들어 나가는 주인처럼 자신만의 이상향을 향해 달려나가길 바래본다.
오늘은 오랫만에 모카포트를 꺼내 선물받아 아끼고 있는 시애틀 스타벅스 1호점의 원두를 꺼내 블라인더로 곱게 갈아 향긋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봐야겠다. 그 에스프레소로 부드러운 라떼 두잔을 만들어 남편과 사이좋게 마셔야 겠다. 꼭 <수요일의 커피하우스>가 아니라도, 내 부엌에서 나만의 커피 의식을 치루며 슬로우푸드를 지향하는 주인의 마음을 느껴봐야겠다. 아, 직접 만든 식빵은 아니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크림치즈를 살짝 바른 토스트까지 곁들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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