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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이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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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앙 2014. 5. 3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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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느린 호흡으로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갔다. 내가 책을 잡고 있었던 시간. 9일.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 내려가는 내가, 덮지 않을 책을, 어쨌든 끝까지 읽어 버리고 싶은 책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읽어본 적이 없다. 온통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참 힘들었던 책. 결국 마지막 장 까지 덮고 난 후에, 큰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던 책을 마음에 기록한다.

 

 

『오늘 밤에도 바람에 별이 스치운다』

 

이야기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남자의 기록이다.

와타나베 유이치.

살아 남았지만 죄인이 되었고, 죄인이 되기 전에도 많은 진실들 앞에 혼란스러워 했던, 그저 시대의 앞에선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던 이제 겨우 10대의 일본인 청년. 그가 사랑했던 책들, 문장들, 시구들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불태우며 그는 살아 남았다. 그리고 그는 그 손 끝으로 새로운 기록을 전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

'스기야마 도잔' 이라는 악명높은 간수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의 수사와 스기야마의 후임으로서의 책임을 맡은 유이치는 피아노를 치는 간호부 소속 미도리, 죄수번호 331번의 최치수, 645번의 히라누마 도주(윤동주) 등을 만나 스기야마의 죽음과 철저하게 가려진 진실에 한발자국 씩 다가간다. 그가 알아낸 사실, 알아서는 안 될 진실, 그리고 몰랐으면 했던 이면의 얼굴들.

이야기는 액자형 구성으로 전개된다. 시작은 유이치였고, 끝도 거의 이야기지만, 진짜는 유이치가 전하는 스기야마와 윤동주의 이야기이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1권은 645번 히라누마 도주와 악명높은 폭력 간수 이지만, 실상은 허세일지도 모르는 포장된 것이 더 많아 보이는 스기야마가 만나는 이야기이다. 글자도 몰랐던 스기야마는 문자 그대로를 처음 배운 검열관 이었다. 문자는 정형화 된 언어전달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그에게 윤동주의 문장들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인생의 순간들을 만들어 주었다. 글 속에 숨어있는 역설과 은유, 상징 그리고 프린시스 잠, 릴케의 구절들을 통해 스기야마와 동주는 소통한다.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2권. 이제 유이치는 스기야마와 같은 검열관이 되어 윤동주를 마주한다. 마치 스기야마의 또 다른 모습이 되어 유이치는 동주의 행간을 읽으며 그와 소통하려 한다. 동시에 유이치는 스기야마의 죽음과 그에 관한 진실에 더 다가가며 인간의 탐욕스러움과 추악함을 마주한다. 그리고 무기력한 자신의 처지에서 고민하는 사이 윤동주의 죽음을 맞이한다. 유이치의 멈춰버린 사고(思考) 앞에 그의 검열을 기다리는 한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이야기의 중간, 동주가 언덕 위에서 연을 날리는 장면이 있다. 없는 종이 대신 속옷을 찢고, 자투리 천, 죄수복의 솔기, 주먹밥 등으로 겨우 형태만 만든 연을 목숨을 걸고 언덕위에서 띄운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바람을 스기야마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 장면에서 나는 영화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이 생각났다. 간수장 사무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아리아를 수용소 전체에 울려퍼지게 한 그 순간의 앤디와 수용소 담장 밖으로 얼기설기 만든 연을 날리던 순간의 윤동주. 둘의 순간 만큼은 수용소 안, 모든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유의 공기를 느끼게 해 주었던 고요의 순간은 아니었을까.

 

 

『나를 부르지 마오』

 

한줄의 글이 인생을 변하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혼을 가득 담은 단어, 간절한 바람을 담은 문장.

글로, 활자로, 입으로 전해지는 고전들. 삶의 진리를 닮은 시구들. 그 모든 글들은 자유를 향한 최후의 유일한 도구는 아니었을까. 말(言)의 사원(寺) 안에서 스기야마와 동주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간수도 죄수도 아닌 채로 글을 나누고 문장을 사랑하고 지하의 은밀한 공간을 공유하는 영혼의 교류자 였을 뿐, 전혀 교집합이 없던 두 사람의 비밀 또한 고요한 문장의 힘 이었을 것이다. 그 은밀한 힘을 몰랐던 스기야마는 무자비하고 난폭하고 처절하게 전쟁에서 살아남은 파괴 된 영혼이었다면, 그 모든 것들을 알고 난 이후의 스기야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하던 20대 중반의 조선인 청년만큼이나 청초한 영혼을 가진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정명 작가의 이야기들은 교묘하게 사실과 허구를 넘나든다. 팩션이라 명명된 장르 안에서 어디까지가 FACT 이고 어디까지가 FICTION 인지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번 이야기는 뻔히 눈에 보이는 사실 안에서 허구를 찾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읽어 내려가기가 참 힘들었다. 단편적인 사실보다 작가의 상상이 들어간 허구의 모습이 어쩌면 내가 잘 모르는 진실의 모습에 오히려 한 발 더 다가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의 외침 안에서, 그 문장들 사이에서, 난 두려움을 느꼈었다.

 

두권의 책을 다 읽고 난 후, 다시 내 손에 들린 것.

크기와 두께 모두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윤동주 평전> 한권과 학창시절부터 고이 간직해 오고 있는 그의 유일한 시집 한권. 다시 그의 삶과 시 안에서 그의 모습을 되새기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도 윤동주를 만나보고 싶어졌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것들.

 

붉은 죄수복, 혹은 누런 간수복.

굵고 촘촘한 철장, 혹은 높은 벽돌담.

그 담장 밖의 전쟁이라는 철창.

그리고 죽음

 

- <스기야마의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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