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작인 <희랍어시간>을 1/3쯤 읽다 덮었다.
건조한데다가 서사적이지 않은 문장들이.. 내가 지금 읽고 있는게 함축적인 시인지 이야기의 나열인지 알 수 없는 혼란속에 결국 책장을 덮어버리고 말았었다. 몇달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그 책을 다시 펴들 깜냥 따윈 나에게 없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책장 한 구석에 조용히 책을 진열중이다.
그러는 와중에 책장에 꽂혀있던 한강작가의 또다른 책이 불현듯 눈에 들어왔다. 2008년쯤인가 아이를 유모차에 끌고 서점에 책 구경 갔던날. 난 그때 이 작가를 몰랐고 다만 연작소설 이란 부분에 끌려 책을 펴고 몇 장쯤 확 빨려들어가려고 할때 마침 아이가 칭얼대는 바람에 서점에서 결국 돌아나올 수 밖에 없었던 그날 읽었던 바로 그 책이 보였던 것이다. 사놓고 읽어 보기는 했지만 짧지만은 않은 중편 분량의 3가지로 이루어진 책을 한번에 작심하고 앉아서 읽은적은 없다. 이야기의 연결은 알지만 주의깊게 보지않아 정확하게 생각이 안나는 부분들, 눈에 띈 김에 책을 부여잡고 하루를 보냈나 보다.
광기, 욕망, 현실에 대한 이야기들의 연속.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가 꿈에서 되살아나 더이상 고기를 먹지 않는 영혜. 영상에 대한 예술적 집착 또는 욕망에 사로잡힌 '그'로만 지칭된 영혜의 형부이자 인혜의 남편. 정신병원에 있는 영혜를 본 후 죄책감과 책임감, 그리고 삶의 고단함 안에서도 절망할 수 없었던 인혜. 세 사람의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자의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생각 안에서만 맴돌던 것들이 현실로 표출됐을 때의 겉잡을 수 없는 그 광기. 인혜는 겉으로 보기엔 지극한 평범이라는 범주 안에 속해 있었지만 영혜와 그는 달랐다. 생각하는 대로, 생각이 가는대로, 무의식이 지배하는 그대로를 실행에 옮기고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영혜는 자살기도, 이혼, 정신병원 감금 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고, 그는 더러운 추문에 주인공이 되어 아이와도 만나지 못하고, 부인에게 외면당하는 지경 - 어쩌면 그는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 에 이르렀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홀로 남겨진 인혜. 남편을 떠나보내고, 부모도 돌보지 않는 이제는 핏줄 뿐이라는 자각의 동생과 자신의 분신인 아들 하나를 기르며 여러가지 상황에 휩쌓인 자신과는 대조되게 현실에서 점점 이탈해 버리는 동생의 모습을 지켜보며 뻗어나가는 망상에 시달린다.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고 아이때문에라도 그래야만 하는 남과는 다르지만, 그녀에겐 보통인 일상을 살아내가며 이제는 죽음밖에 남지 않은 듯한 동생을 바라보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작가님의 문장을 읽다 보면 나는 그 유연함에 좌절한다.
폭발하듯 터지는 흡입력이 아니라 조용히 아우르듯 감싸는 기분이 드는 문장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작가라는 선입견을 결코 지울 수 없게 만드는 음절 하나하나는 그녀의 손을 거쳤기에 더욱 특별해 보인다. 내 안에 들어 앉아 나 이외의 다른 모든것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다시금 배워야 하나..란 생각도 지울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손을 놓아버렸던 <희랍어 시간>을 다시 펼쳐 들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 같다.
2010년에 이 작품이 동명의 영화로 개봉되었다고 한다. 원작에 충실하게 표현되었다고 하는데 조만간에 구해서 봐야겠다. 영상으로 펼쳐지는 이 광기의 집착, 욕망의 발로, 그리고 타협되는 현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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