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아.
이제는 나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종사촌 지간, 같은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였지만 역시 데면데면했던 첫 만남부터, 할머니 때문에 찍었던 둘녕이와의 첫 사진. 색깔은 달랐지만 같이 입게 되었던 둘의 잠옷. 금빛먼지를 바라보며 몇번이고 읽어내려간 명작전집. 주인없는 율이 삼촌 방에서의 캠핑, 날은 차가웠을 테지만 그 시림보다는 따뜻함이 더 컸을 렌턴의 불빛. 둘녕이 만들어 준 환약을 부적처럼 담아놓았던 유리병. 중학교, 고등학교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까이 있을 줄 알았지만 결국은 멀어질 수 밖에 없었던 둘의 생각들......
수안아.
나는 때로는 시간이 어느정도 흘러 내가 늙어, 어느순간 죽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어. 난 도저히 그럴것이라 가정할 수 있는 내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지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 순간, 너처럼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던 것 같아. 어린 둘녕의 눈에도 보였던 너의 불안을, 무어라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너의 외로움을, 둘녕이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한다 말할 때 네가 느꼈을 서운함을, 지금의 내가.. 자격이 된다면.. 손을 들어 살살 어루만져 주고 싶어. 괜찮다 괜찮다 이야기 해 주고 싶어. 가슴으로 깊이 몇번이고 안아주고 싶어.
수안아.
살아보니까.. 그냥 그렇더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숙제를 풀어나가다 보니 그냥 살아지는 것 같더라.
내가 살아본 30년이란 짧은 삶 속에서 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 되더라.
나의 이 짧은 글귀가 너에게 작은 위안으로 남길 바라며. 그럼 이만 총총..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나도 둘녕의 이야기들 처럼 그때를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롯이 둘녕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아버지손을 잡고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외갓집이란 곳으로 가 처음 만난 친척들. 외할머니, 이모들, 이모부, 외삼촌.. 그리고 이종사촌 수안. 그 모든것을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둘녕의 입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사람이 혼자 얘기하는 것을 끊임없이 듣다보면 어느샌가는 지치기 마련이다. 게다가 재미와 흥미진진함을 이끌어내는 서사적 이야기도 아니다.
마치 특별할 것 없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나직이 이어가며 이야기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또 무의식의 세계까지 드나들며 많은 이야기를 펼쳐놓지만 이 이야기는 어쨌거나 둘녕 혼자만의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더 호기심이 생긴다. 지칠틈이 없다. 쉴새없이 여기저기를 오가며 그 다음장을 넘기게끔 만든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모암마을, 수안과의 추억, 그 편린 하나하나들 모두 쏟아지듯 흘러나온다. 유유히 흘러가는 듯 하지만 이야기가 주는 조용한 힘에 의해 어느새 나는 책 안으로 쉴새없이 빠져들어 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았으면, 그저 순수하고 어리기만 했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장을 차마 더 넘기지 못한 채 몇번이고 덮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둘령의 이야기들은 나를 그렇게 빠져들게 했다.
너무나도 기다렸던 정말 좋아하는 작가님의 책이었다.
제목과는 다르게 마음 편하게 만은 읽지 못했던 <사랑스런 별장지기>. 건PD와 진솔. 내가 정말 사랑하는 그들의 이야기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그리고 둘녕의 이야기었지만, 내가 읽어 내려감과 동시에 더 이상 그녀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어버린 <잠옷을 입으렴>. 내가 참 잘 우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도우님의 책 3권을 읽을 때 모두 눈물을 흘렸나 보다.
다인과 상헌의 안타까운 마음들을 읽을 때도, 진솔과 건의 엇갈리는 시선들을 읽을 때도, 둘녕이 기억하는 수안의 모습들과 그 시절 모암마을의 모습들을 마주할 때도, 나 혼자만의 감정에 빠져들어, 슬픔과는 또 다른 안타까움에 가까운 그 감정들 안에서 나는 결국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기다림이 길었던만큼 너무나도 아끼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이 책을 보며, 앞으로도 작가님의 더 많은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잔잔함 속에서 순간 격랑이 일듯, 언제나 무감각해 보이는 내 안의 감정이 거짓없이 발현되어 버린, 그 시절 감성들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는 둘녕의 목소리가 마음안에서 맴도는 이야기 <잠옷을 입으렴>. 이 봄을 시작하는 나에게 마냥 화사하지만은 않은 초봄의 담담함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될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사랑하는 고둘녕. 네가 스웨터를 짜고 있을 땐 나는 곁에서 같이 아늑해져. 넌 털실을 짜고 난 시간을 허비하지. 넌 물레를 돌릴테고 난 딸기잼을 휘젓겠지. 축복할게, 내 사촌. 언제나 마법같은 손길 지니기를. 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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