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렸던 애니메이션을 봤다.
고작 러닝타임 46분짜리 애니메이션이지만, 여운과 감동은 460분도 넘을 것 같다.
신카이 마토코 감독의 작품이란건 알았지만, 이 미친 영상미 어쩌면 좋아!
실사를 방불케 하는 장면 장면들을 볼때마다
미적감각 현저히 떨어지는 나도 전율을 느낄만큼 아름답고 황홀했다.
타카오가 구두를 만드는 것이 꿈인지라,
구두와 발에 대한 클로즈업 컷이 종종 등장하는데,
가령 이런 컷들.
발에서 시작되어 얼굴로 이어지는 시퀀스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이 영화엔 구두, 비도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지만,
왜 내가 발에만 포커스를 두었냐면...
타카오, 몰래 유키노의 발을 훔쳐보는 중 ^^
바로 이 장면.
타카오가 첫 여자 구두를 만들기 위해 유키노의 발을 관찰하고 사이즈를 잰다.
카타오의 순수한 손길은 무덤덤한데,
이 장면, 나에겐 상당히 관능적으로 다가왔다.
타카오가 굳이 여자구두를 만들겠다며 나선 이유.
잘 알지도 못하는 유키노에게 이런 청을 한 이유.
그리고 구두를 만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일 뿐인 이 장면들.
모두 한데 뒤섞여, 나에게는 내가 아는 관능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유리창으로 빗물이 떨어지던 날 둘의 대화와 함께
영화는 절정에 이른다.
여름의 정점이 이미 지나가버린 9월에 내리는 갑작스러운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
감정의 폭발. 그리고 엔딩크레딧이 끝난 후의 두 사람.
정확한 일본의 서정적 정서가 물씬 풍겨나올 수도 있다.
격정적인 클라이막스가 눈에 띄게 보이지 않고, 대사도 많지 않지만,
모든 것은 분위기와 작은 소품, 간단한 장면만으로도 모두 설명된다.
짧은 러닝타임 이지만, 소소한 단편소설 한 편 본 것 마냥 마음은 꽉 들어찬다.
만약, 장편으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면, 조금은 지루해졌을 것 같기도 하다.
영화 장면 내내 도쿄의 곳곳이 보였다.
항상 타고 다니던 야마노테센.
전철이 들어오고 나갈때, 플랫폼에서 들려오던 주의 멘트들.
시부야로 향하는 길목의 신주쿠거리.
나는 벚꽃이 만발할 때 가본 신주쿠 교엔.
신주쿠 교엔으로 들어가기 위한 200엔짜리 자판기.
신주쿠 교엔 안에 있던 호수.
정말 다시 한 번 도쿄에 간다면, 꼭 신주쿠 교엔에 다시 가보고 싶다.
천둥소리 저 멀리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텐데.
천둥소리 저 멀리 들려오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난 머무를 것입니다.
한국어 제목을 <언어의 정원> 이라고 지었지만,
言語 나 言葉이라는 단어의 제목이 아니라,
'言の葉' 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바로 이 만엽집에 들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하면 <언어의 정원>만큼 좋은 말은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그 의미가 조금 더 들어가는 다른 단어였음 어땠을까 싶다.
(절대 혼자 생각 못해냄 ㅡ_ㅡ;)
문학과가 아닌 어학과를 나온 나에게 만엽집은,
하이쿠나 겐지모노카타리 만큼 멀리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만엽집 한번 찾아서 읽어봐야 겠다!
그리고 일본어판 포스터의 구절.
"愛(あい)" よりも 昔, "孤悲(こひ)" の ものがたり.
한국어 포스터에선 <사랑, 그 이전의 사랑 이야기> 라고 해석했는데,
요기도 만엽집에 관한 내용이 조금 숨어있다.
愛(あい)는 사랑이 맞지만,
孤悲(こひ)는 뭔가 싶어 찾아보니..
지금 쓰는 戀(こい) 의 옛 표기법이었다.
중국에서 한자를 차용해 비슷한 발음으로 표기한 거라는데...
외롭고 슬프면 해야하는게 바로 사랑이라 그런건지,
단순히 발음만 갖고온게 아니라 뜻도 참 적절한 느낌이 들었다.
여름. 비. 구두. 발.
그리고 두 사람.
DVD가 나오면 꼭 사서 좋은 영상 고이 간직하고 싶다.
서진이 개학하면, 한번 더 영화관에 가서 보고 싶다.
대본집도 구해보고 싶다!!
201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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