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서가]를 운영하는 영재는 기억을 잃었다.
그에게 남은건 이영재라는 이름, [이씨서가]라는 헌책방, 사법고시 합격증, 어느 날 배달된 지갑 안의 사진 한 장.
도대체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고가 났으며, 2년간 자신을 찾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자기 자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을 찾기가 두렵다.
그리고 예전의 그를 기억하는 고등학생 수아가 있다.
비밀의 열쇠를 간직한 것 처럼 열쇠 목걸이를 쓰다듬으며 영재의 주변을 맴도는 그녀는 영재를 짝사랑 중이다.
매일 [이씨서가]를 들르며, 영재에게 아이스크림도 내밀며, 그의 관심을 끌어보려 한다.
그녀가 가진 열쇠는 그의 기억을 되살려 줄 수 있을까.
류수영이라는 남자가 예전예전 어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어남선 이라는 본명으로 첫 등장했던 방송을 기억한다.
그 때는 엉뚱한 요리를 하는 대학생 팀으로 나왔었는데, 우리 동네에 있던 대학교 학생들이라 관심있게 봤었었다.
단지 정우성 닮은 꼴의 그 남자가 데뷔를 하고,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을 해도 별 관심이 없었는데,
<서울 1945>라는 호흡이 긴 드라마를 본 후, 이 남자 연예인이 아니라 배우가 되겠구나 생각했었다.
그 후 그가 나오는 드라마를 별로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단막극을 보면서 좀 더 유심히 볼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나 좀 더 깊어진 눈빛과 섬세해진 감정표현 덕에,
호흡이 빠른 단막극이었지만 세심한 영재가 가진 현재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남보라라는 아이는 아직도 연기를 하는 배우라기 보다는 인간극장에 나왔던 13남매의 맏딸로 더 기억된다.
<해를 품은 달>을 잠깐잠깐 볼 때마다 아쉽게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 났었다.
그 이후 나온 영화를 보고싶었지만, 성폭행이라는 소재에 버틸 자신이 없어서 보지 못했으니,
정확하게 그녀의 연기를 본 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이번 단막극에서,
역시 어떤 역할을 맡느냐에 따라 아직은 많이 달라질 수 있는 신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단막극에서 그녀는 정말 맞춤인 옷을 입은 듯 수아만을 보여줬고,
과하지 않게 영재의 기억을 되짚어 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던 것 같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이렇게 자신에게 맞는 역할들을 하나씩 하나씩 하면서 더 발전해나가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
손대지 않은 내추럴한 얼굴도 너무 예쁘고, 나이가 조금 들면 스펙트럼이 넓은 연기들을 충분히 해내리란 기대가 된다.
기-승-전 모두 좋았는데 결말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어서 좀 아쉬웠지만,
단막극 특유의 빠른 전개와 너저분하게 풀어 설명해주지 않는 함축적 스토리들의 묘미를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집중하면서 재밌게 봤다.
이유없이 기억을 잃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기억을 잃는다는건,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도 모두 잊고 싶은 마음의 발현 같다.
재영이 기억을 지운 이유 또한 설득력 있게 잘 그려진 듯 하고, 기억을 찾는 과정도 요란스럽지 않아 좋았다.
하지만 기억 상실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좀 더 독특하게 풀기를 바랐지만, 흔한 소재 이용의 모습은 진부함의 틀을 깨지 못해 안타까웠다.
그래도 배우들의 열연과 일관된 주제를 기준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비록 짧았지만 잔잔한 임팩트의 드라마로 기억될 듯 싶다.
20130613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