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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되돌아가는 세실리아의 마음속에는 짜증이나 당혹스러움보다는 체념이 더 컸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너무 생생하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는 인상들, 자기 의심, 의지와 관계없이 너무나 명료하게 보이는 시각적 인상들, 익숙한 것을 낯설어 보이게 하는 섬뜩한 차이들. 이 모든 것들을 사실 그녀가 하루 종일 보고 느껴온 것들의 연정이거나 변주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느낌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 않는게 좋아. 게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하는 옷은 딱 한 벌뿐이었고, 이제 그것을 입을 작정이었다. 분홍색 드레스를 벗어 검은색 드레스 위에 던져놓은 그녀는 오만한 걸음으로 옷더미 옆을 지나 옷장 문을 열고 졸업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산, 등이 파인 짙은 녹색 이브닝드레스를 꺼냈다. 다리부터 넣어 드레스를 올려 입으니 실크의 서늘함이 느껴졌고, 마치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풍기는 여성이 된 것 같았다. 전신거울에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운 인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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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관 벨이 손을 얹었다. 아직도 그냥 돌아가버리고 싶은 유혹이 그를 뒤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안전한 자신의 서재에서 그녀에게 사과의 편지를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겁한 놈! 지금 그의 집게손가락 밑에는 도자기로 만든 차가운 감촉의 현관 벨이 있었다. 마음속에서 또다시 논쟁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벨을 눌러버렸다. 그러고는 문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마치 자살하기 위해 방금 약을 삼켜버린 사람처럼 느껴졌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얼마 후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홀을 걸어오는 스타카토의 여자 구두 소리.
한 구절, 한 문장. 음미하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문장들을 왜 내가 지금서 읽었을까 잠깐의 후회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서술, 구절의 나열들을 본 순간 왠지 모를 희열도 느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바로 이런거야! 하고 말이다. 내가 읽었던 다른 소설들에서도 이런 구절을 찾아본 적이 있었는지 까지 생각해 보았다.
오감을 아우르는 많은 문장들을 읽으며, 내 머리속에선 자연스럽게 영상이 흘러다녔다. 영상미 가득한 문장을 온 몸으로 느끼며, 시각과 청각, 촉각 모두를 만족시키는 문장들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의식의 흐름 기법 이라는 문학적 서술 용어를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현재의 브리오니, 세실리아, 로비의 지금 이 순간을 같이 바라보며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이언매큐언의 [속죄]를 읽었다. 사실 난 이 책을 읽은 목적이 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 [어톤먼트]를 보기 위해서 읽기 시작했다. 약 이틀간 난 이 책을 붙잡고 돌아다녔다. 아이 센터에 갔었고, 극장에 갔었고, 마트에 갔었고, 차 안에서, 유치원 앞에서, 아이가 수영하는 동안.. 그리고 밤 11시가 넘은 이 시각. 나는 마지막 장을 덮으며 한숨과 눈물을 같이 내 뱉어본다.
atonement 보상, 속죄, 죗값.
속죄(贖罪) 지은 지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앰.
이 소설 한 권으로 브리오니의 속죄는 완성이 되었던 걸까.
아니, 브리오니에게 속죄를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겐 있는 걸까.
열세살의 어린 브리오니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대로 이야기한 참혹한 결과를 그녀에게 보상받길 바라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철없던 시절, 순간의 행동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일생을 살아온 그녀를 이대로 용서해야 할 것인지, 책장을 덮고 난 이후로도 한참을 생각했지만..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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