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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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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앙 2014. 5. 31.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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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치.. 카밀라에게 안녕을 고하다..

 

그때 나는 너의 정수리께를 보고 있었지.

 

  머리카락은 윤기가 넘쳤어. 한 올 한 올 하나씩 존재하는 것 같더라. 세포들을 상상했어. 네 몸 안에 있는 세포들. 생성 됐다가 또 죽어가는 세포들. 그 세포들의 삶의 궤적도 상상했어. 그 세포들의 형태는 내가 생물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저마다 완벽하리라 생각했어. 너의 존재 역시 그처럼 완벽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만약 네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그럴 때마다 너는 그렇지 않다고, 너는 스스로 충만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어. 그때 너의 정수리께를 바라보면서. 네게서 연락이 끊어지고 나서, 그리고 더 이상 내게 연락하지 않은 뒤로, 내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너의 부재나 침묵이 아니라 너에게 그런 위로의 말을, 너를 위로하는 행동을, 그렇다고 말하고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껴안고 입맞추는 그 모든 인간적인 위로들을 해줄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어. 마음속으로 누군가의 안녕을 비는 일 따위는 추모비 앞에 선 정치가들에게나 어울리지, 이별을 당한 남자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걸 이젠 알겠네. 어느 틈엔가 나는 너를 위로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를 증오하는 사람이 됐지. 그게 내게는 가장 고통스러웠어. 하지만 지금은 증오는 물론, 그런 고통마저도 다 지나간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야. 지나가면, 우리는 조금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 조금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겠지. 

P.145-146  

유이치가 카밀라에게 보낸 마지막 이메일.

이제 더이상 카밀라가 아닌 희재에게 보낸,

어쩌면 자신의 아내가 될 수도 있었던 그녀에게

사랑의 안녕을 이야기하는 편지.

시간이 지난 후 생겨난 아주 조금의 달라짐으로

이제는 낯선 타인이 되어버릴,

과거의 인연에 대한 미련의 이야기..

 

 

 

 

 

지은.. 희재를 듣고 희재에게 말하다.

 

  "지금까지는 늘 왜 나는 이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했을까가 궁금했는데, 그 뒤로는 그녀가 더 궁금해졌어요. 왜 그녀는 외롭게 죽어야만 했을까.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나보다 어린 엄마를 만난 적이 있어요." 

  나는 네가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네 이야기를 들으며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지훈처럼 나도 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 안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네가 나왔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네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있는 입술이 내게는 없네. 네 눈을 빤히 쳐다보고 싶지만, 너를 바라볼 눈동자가 내게는 없네. 너를 안고 싶으나, 두 팔이 없네. 두팔이 없으니 포옹도 없고, 입술이 없으니 키스도 없고, 눈동자가 없으니 빛도 없네. 포옹도, 키스도, 빛도 없으니, 슬퍼라, 여긴 사랑이 없는 곳이네.

  "나는 어린 엄마를 꽉 안았어요."

P. 228-229 

열여덟의 어린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지키는 일도, 아이를 지키는 일도, 시대와 사회에 휩쓸리지 않는 일도.

그리고 이제 마지막 순간 자신의 나이를 훨씬 뛰어넘은 자신의 딸을 위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긴 사랑이 없는 곳. 하지만 세상의 당연한 이치인듯 아로 새겨진 딸에 대한 사랑.

입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가슴 속 어느 한 곳에 자리잡아 그냥 저절로 알아버리게 되는 것들.

 

 

 

 

 

카밀라. 지은. 우리. 그리고 희재. 화자가 4번 변하지만 이야기의 줄기는 하나다.

카밀라가 지은을 찾아 희재가 되고, 희재는 지은의 흔적을 찾고, 지은의 흔적을 아는 사람들은 우리가 되어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희재는 희재와 지은을 만난다.

 

나는 만 하루를 온통 이 책에 쏟아 부으며 마치 잔잔하지만 울렁이는 파도를 헤치며 깊은 안개속을 유영하듯 떠가는 작은 배에 올라 탄 기분이었다. 무언가 끝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 그 안에서 결국 나 혼자만 느껴야 할 혼란. 진실을 마주하기 까지의 두려움. 내가 희재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녀가 다시 진남으로 돌아가기까지 걸린 시간처럼 짧지만은 않은 망설임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한글자씩 읽어나갔다. 

 

김연수 작가의 글은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다른 글을 읽을 때 보다 딱 2배의 시간이 더 걸리곤 한다.하지만 이번 글을 읽으며 지은에게 가까운 시선으로 희재를 들여다 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 이후, 더이상 문장들이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김연수 작가님을 좋아하세요? 하고 묻는다면, 난 단번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의 글에는 좋다/싫다의 개념 보다는 동경이나 경의라는 말을 선사하고 싶다. 남성성의 강함을 주장하지도 않고, 선이 굵거나 단조롭지도 않다. 섬세하게 그리고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그 안에서도 내 감정을 다잡을 여지도 남겨준다.

그래서 참 친절하다.

 

하루종일 비가 온다. 어제 밤 몇장을 보다 덮고 4시간을 잤다. 새벽부터 내린비는 아침이 되도 여전했다.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어제 밤 본 몇장을 도로 되돌려 1부의 첫 챕터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여전히 비가 오는 저녁. 뻐근해진 눈가를 비비며 내가 다 읽은 책을 들춰 밑줄 그은 부분을 다시금 읽어본다. 그리고 작가가 쓰지는 않았지만 읽었으면 하는 이야기들, 비록 활자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마음속에는 이미 빼곡한 그 이야기를 생각 해 본다. 

 

이제는

안녕, 희재.

안녕, 지은.

여전히 우리는 서로 낯선 타인이지만,

이제는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 진남의 그 바다를 볼 수 있는 정도는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다여

바다여

진남, 그 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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